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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이 시대 교사에게 가장 아쉬운 자질이 “전복적인 자세” 혹은 “과격함”이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과격함이 과연 능사인가?” 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은 늘 좌우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이 이치를 멋지게 묘사한 파울루 프레이리의 훌륭한 개념이 있다. 영어로 impatient patience인데, 그대로 풀이하면 “참지 않으면서 참기”이다. 얼핏 보면 말장난 같이 들린다. 참으면 참고, 참지 않으면 참지 않는 것이지, “참지 않으면서 참기”라 하니 모순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심오한 진리는 그런 식의 미분화된 형식논리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없다. 모순에는 ‘논리적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이 있는데, 이 개념은 변증법적 모순에 해당한다. 논리적 모순과 달리 변증법적 모순은 복잡다난한 인간 삶의 오묘한 이치를 설명하는 지혜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이나 동양철학에서 이런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정중동(靜中動),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따위의 명제가 그러하다.
 
첫발령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교육청을 폭파시키는 생각을 품는다. 현장교사인 사람은 알 것이다. 교육지원청이 학교교육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초임교사시절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것이다. 수업 한창 하고 있는데, 교감에게 인터폰 와서 “급한 공문이 있으니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설령 내 잘못으로 보고기한을 놓쳤다 하더라도 그렇다. 교사에게 수업이 중요하지 공문이 대수인가?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수천 장의 공문 가운데 교육에 유용한 것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다. 선량한 교사이면 교육청에 대한 타오르는 적개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참는다. 교육청을 폭파시킬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새파란 신규교사가 교감에게 대들 수 없다. 눈물을 머금고 공문 작성을 하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이게 impatient patience이다.
 
교사라는 사람이 교육청 폭파시키는 망상을 품다니 정신병자 아닌가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학교는 교사를 미치게 만드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미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그 자는 정상적인 교사가 아니다. 사실, 그런 교사가 더러 있다. 수업시간에 교감이 공문 보내라고 하면, 아무 갈등 없이 아이들 자습시켜 놓고 페이퍼워크 몰입 모드로 전환한다. impatience(참지 않기)는 없고 patience(참기)만 있는...... 이런 사람, 개인적으로는 세상 참 편하게 살 지는 모르지만, 선생은 아니다. 교육은 내재적으로 ‘공교육’이다. 공공의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적 편의만 좇는 사람은 선생이 아니다.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에 대한 고민은 없이 교육청에 공문 제때 보내는 것만 강조하는 곳은 학교가 아닌 공장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척척 해내는 사람은 선생이 아니라 공돌이다.
 
반면, patience는 없고 impatience만 있는 교사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전교조 선수들 가운데 이런 사람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그 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었다. 리버럴한(?) 구미에서 갑갑하기만 한 칠곡으로 옮긴 첫해였다. 학기초에 매주 직원협의회 할 때마다 벌떡 일어서서 “뭔 쓸데없는 짓을 이렇게 많이 시키냐고, 도대체 이게 학교냐고?” 떠들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장/교감이지만 나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내게 반박하지 않았지만, 거꾸로 내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도 몇 없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때 나는 “저 또라이 같은 놈 땜에 평온하던 학교가 시끄럽다”고 뒤에서 나를 욕하던 교감 주위의 승진파 선배교사들보다 나를 도와주지 않는 선량한 후배교사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사람은 아픈 만큼 성장한다. 그 경험으로부터 내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대중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삶은 관계다. 옳은 말은 맥락적으로 옳을 때 옳은 것이 된다. 관계망 속에서 옳아야 옳은 말이 되는 것이다. patience는 없고 impatience만 있는 벌떡교사가 일어서서 떠들 때마다 사람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따뜻함이 수반되지 않은 용맹정진의 결과는 고립이다. 과격함이 능사가 아닌 이유라 하겠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으로 접근해야한다.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보편타당한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우리 시대 교사들에게 과격함이 필요하다 한 것은, 1)임용고시 따위에 길들여져 젊은 교사들이 너무 온순한 것과 2)이명박근혜의 암울한 10년을 지나면서 학교가 심각하게 우경 보수화 된 맥락에서였다.
 
1) 자신이 너무 온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과감성과 결기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 반면, 현재 ‘벌떡교사’에 가까운 (이를테면) 전교조 활동가들은 온건한 리더십을 단련해야 한다.
 
2)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학교는 더 이상 나쁠래야 나쁠 수 없을 만큼 나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좋아질 것이다. 유념할 것은, 보수반동의 세월을 뒤로 하고 혹 급진적인 주장이 난무하는 상황을 경계할 일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런 오류를 겪었기 때문에 현정권기에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가능성이 적지만, 그래도 진보를 자임하는 분들은 이런 우려와 경계심 속에 늘 성찰하는 자세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애타는 인내심 impatient patience.
어느 정도 애가 타야 하는 것일까? 얼마큼 분노하고 얼마큼 참아야 할까?
정답은 없다. 道可道非常道.
진리는 항상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법이다. 주관적 요건과 객관적 요건에 따라 그 비례배분은 달라야 한다. 이를테면, 과격함이라는 옷이 아직 몸에 맞지 않는 분은 impatience보다 patience에 더 치우칠 일이다. 그리고 타격의 대상이 얼마나 공고하며, 이웃들이 얼마나 우호적인가에 따라서도 patience와 impatience의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
 
patience와 impatience의 비례배분이 어렵다면, 다음과 같은 원칙에 입각해 판단을 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첫째, 선량한 교장/교감 선생님에겐 최대한 예의를 지켜 드리자.
인간 같잖은 악질 관리자에겐 아무리 심하게 해도 괜찮다. 그런 경우라면, 설령 주위 사람 모두가 얼굴을 붉힌다 하더라도 용맹정진할 필요가 있다. 그런 동료들은 결코 선량한 이웃이 아니다. 간교한 김영삼 무리가 3당 야합을 획책할 때, 노무현처럼 또라이 짓을 해야 한다.
악질 관리자에겐 강력한 impatience로 응징하던 교사가 선량한 교장선생님에겐 깍듯이 예의를 갖춘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두 경우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평론을 내릴 것이다.
- 저렇게 예의 바른 선생이 한때 그렇게 모진 모습을 보였다면, 그 교장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 교사로서 본을 보이자.
투사이기 이전에 교사다. 교사로서 아이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은 어떤 행보를 펼치더라도 무난히 지지 받을 것이다. 권력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학교사회에선 교포, 즉 교장 승진을 포기한 사람이 그러하다. 그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자기 일 열심히 하면서 교포인 사람이다. 그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교포에다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셋째,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impatient 하자.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대의, 아이들과 학교 그리고 교육발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전교조에서 외치는 “아이들을 위해”라는 말이 공허한 구호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분별력을 갖기 위해 교사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안 하고 투쟁정신으로만 무장하면 깡패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애타는 인내심 impatient patience.
말처럼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애가 타야 한다는 것이다. “impatient patience”는 조바심과 인내심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현금의 젊은 교사들에겐 인내심보다 조바심이 더 중요하다. 조바심과 인내심은 정반대의 극단(양극성, bipolarity)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바심이 클수록 많은 인내심을 요한다. 즉, 그만큼 아픔과 스트레스가 심한 것이다.
 
하지만......
아픈 만큼 성장한다.
impatience와 patience 양극단의 진폭이 크면 클수록 많이 성장할 수 있다.
 
나침반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늘 몸을 좌우로 바르르 떤다.
하지만, 우리가 나침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좌우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좌우로 떨지 않고 처음부터 한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난 나침반이다.
 
수업 중에 공문 보내라는 독촉이 올 때, 떨지 않는 교사는 선생이 아니다.